한때 무협작가들과 작업을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구대문파가 어떻고, 십팔반무기가 어떻고, 소호강호가 어떻고, 계림이 어떻고...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더군요. 한마디로 신세계였습니다.
그래도 자라면서 남동생이 무협만화에 빠져드는 걸 본 적은 있던 터라 남자들한테는 재밌는 건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보게 된 무협영화가 <와호장룡>이었습니다.
<와호장룡> 2000년 8월 개봉. 감독 이안. 주연 주윤발, 양자경, 장쯔이, 장첸
결론은, 와우~~ 한마디로 아주 멋졌고 재밌었습니다.
고수 냄새 넘 심하게 풍기는 주윤발에 오그라들고, 양자경과 장쯔이가 붕붕 날아오르며 싸울 땐 등에 매단 끈이라도 보일까봐 조마조마했지만(ㅋㅋ) 시원한 화면과 춤을 추듯 펼쳐지는 경공, 현란한 액션에 빠져들 수밖에 없더군요.
특히 대나무 숲에서의 주윤발과 장쯔이의 결투 씬, 양자경과 장쯔이의 표국 마당에서의 대결 씬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 중 하나랍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무협영화, 다행히 실망시키지 않아서 고마운 영화, 와호장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온통 빛뿐이었어. 시간도 공간도 사라졌지. 그것은 사부님도 말한 적이 없는 경지였어.”
무당산에서 홀로 무예 정진을 하고 돌아온 이모백은 사매 수련에게 자신이 체험한 경지를 말하며 강호를 떠나겠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기에 400년 역사를 지닌 보검 청명검조차 평소 도움을 많이 받은 어르신에게 드리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날 밤 청명검은 도난을 당하고 맙니다.
이모백과 수련은 그 범인이 겉으로는 여리여리해 보이나 놀라운 무공을 소유한 명문가의 외동딸 옥소룡이라는 것을 눈치챕니다.
정략결혼의 강요 속에서 여자로서의 삶보다는 자유를 갈망해오던 소룡은 무협소설에 나오는 멋진 영웅들처럼 강호를 누비는 최고의 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청명검을 훔친 것도 유모에게 몰래 배운 무공 실력을 뽐내보려는 장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제자로 삼고 싶었던 유모는 그녀에게 무협소설을 읽히며 강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줘왔던 것이지요.
그녀의 치기어린 마음을 알아본 이모백은 한 수 가르침을 내립니다.
“이모백도 청명검도 이름일 뿐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절제 없는 욕심은 버려라. 생각을 버려야 자기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모백이 깨달은 삶의 이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모백 역시 도난 사건을 통해 자신 역시 아직 속세에 미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사부를 죽인 원수 ‘푸른여우’가 소룡의 유모로 가장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복수를 해야 했고,
철없는 공명심에 들떠 있지만 무인으로서 재능을 지닌 소룡을 수제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청명검을 찾아 기쁘냐”는 수련의 말에, 이모백은 “잃었다 다시 찾으니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아직 세상을 버리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한편 제자가 되라는 이모백의 제안을 거절하고 결혼을 진행하던 소룡은 과거 사막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마적단 소호의 등장으로 결혼마저 무산되자 강호로 떠납니다.
남장을 한 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지요.
청명검을 과시하듯 휘두르며,
“나는 속세를 초월한 신선이며 중원 최고의 고수다”라고 소설책에서 읽었을 법한 대사를 외칩니다.
얇고 가볍지만 탁월한 울림과 날카로움을 지닌 천하의 보검 청명검.
청명검은 이모백에게는 속세를 떨치고 해탈하기 위해선 반드시 버려야 할 대상으로,
소룡에게는 여자라는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나 최고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할 대상으로 자리잡으며 인간의 이중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또한 청명검은 이안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지요.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얻어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홀연히 초월하고 싶은 욕망.
어쩌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모백도 소룡도 청명검의 주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푸른여우와 이모백은 대결 중에 죽고, “어떤 인생을 살든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충고를 남긴 채 수련마저 떠나자,
소룡은 소호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소호와의 재회 후 소룡은 계곡으로 몸을 날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유를 찾은 듯 자욱한 안개 사이로 서서히 떠내려가는 소룡.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요.
그렇게 소룡은 수련이 말한 진실한 삶을 선택했다고 말해주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든 것을 취하고자 했던 욕망이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의 찰나적인 진실, 착각이라고 보여지더군요. 다 버리겠다는 그 마음조차 없애지 않으면 결코 그토록 갈구하던 진짜 자유를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평론가들로부터 ‘우리가 극장에 가는 모든 이유가 담겨 있다’는 극찬을 받은 <와호장룡>.
와호장룡은 ‘웅크린 호랑이와 숨은 용’이라는 뜻으로, ‘영웅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그리 와 닿지 않은 제목이었습니다.
영화 속 내용으로 볼 때 어떤 영웅이 숨어 있다는 건지...
이모백도 소룡도 수련도 그저 자기 운명에 맞게 그 역할에 맞는 삶을 살아갔을 뿐으로 보였거든요.
그러다 소룡이 안개 자욱한 계곡으로 뛰어내리는 결론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안 감독은 웅크리고 숨어 있는, 나조차도 모르는 내 마음들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고요.
저에게는 옥소룡과 이모백의 모습이 둘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좀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조용히 평범하게 튀지 않게 살고 싶은 마음.
두 욕망이 웅크려 있다가 필요에 따라서 변명과 합리화의 도구로 쓰이기도 하지요.ㅎㅎ
감독의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 결론은 이거네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 마음들이 있는 한 나에게 진정한 자유란 멀기만 하겠구나....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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