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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 읽기

적은 내 안에 있다 _ <밀정>

by 지제이스토리 2016. 10. 21.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밀정>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시대극, 특히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앞에선 마음이 무거워지고 진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선택하는 편입니다. 자칫하다간 화병만 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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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암울한 1920년대...
역시나 <밀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회색과 갈색 톤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긴장감, 복합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영상, 힘 있는 구성과 깊이가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평론가가 아닌지라 세세하게 음악이 어떻다, 미술이 어떻다, 연출이 어떻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관객 입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혹은 시대극을 대할 때 갖고 싶은 시선과 감정은 충분히 느끼게는 해주었습니다.
역시 장르의 탐험가, 세공사라 불리는 김지운 감독 작품이구나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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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은 의열단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인이나 일본 순사였던 황옥은 의거를 돕기 위해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직접 폭탄과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황옥이 의열단에 잠입한 일제의 밀정이었는지, 친일파로 위장한 독립투사였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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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분) 역시 조선인으로서 일본 경부까지 올라갔고, 의열단과도 활동합니다.

이중첩자인 거지요.

 

적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정보를 빼내야 하는 쪽과 내부에 침투한 정보원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하는 쪽.

어느 쪽이 먼저이냐에 따라 나 개인과 동료, 조국조차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액션보다는 정적인 분위기에서 벌어지는 심리전이 심장을 조여옵니다.

 

송강호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어느 쪽의 신뢰도 얻을 수 없으나 어느 쪽에서도 신뢰를 얻어야 하는 밀정으로서의 삶, 결국은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선택의 순간이 닥치고... 그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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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출연으로 나온 이병헌, 박희순은 물론,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그 외 모든 조연들도 영화에 몰입하는 데는 충분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 명장면 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것은, 의열단장 정채산과 독립운동가 김우진, 밀정 이정출의 새벽 음주 씬입니다.
동포들끼리 술이나 한잔하자며 세 사람은 한 말은 넘어 보이는 술을 계속 마십니다.
아무 말도 없이..., 마시고, 따르고, 건배하고, 또 마시고, 따르고 건배하고....

 

저들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어떤 심정일까,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정말 저 순간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겠구나... 하며 더욱 몰입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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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던 세 사람은 밤낚시까지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이 밀정 이정출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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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일제 강점기에 관련한 역사를 배울 때면, 참 답답하고 짜증도 많이 났었습니다.
무능해 보이기만 한 권력자들,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자기만 옳다 주장하느라 하나 되지 못했던 모습들에, 그런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의 운명에 화도 많이 났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뒤따르던 상상도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시절에 살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내 목숨 따위는 내놓은 채,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 용맹한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이 기회에 나도 권세 좀 부려보겠노라며, 조국이고 동포고 다 몰라라하고, 뻔뻔한 친일파가 되었을까.
아니면, 독립 못 시키는 사람들 욕이나 하고, 하늘 바라보며 한숨이나 쉬면서...,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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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비장하면서도 굳건해 보이는 독립투사들의 모습에 경외심이 들 때면 독립투사였을 나를 상상하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나 끔찍한 고문 장면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아마 나는 못 버티고 친일을 했을 거라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도 나는 밀정 같은 부류의 인간이지 않았을까.

 

오늘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사를 것처럼 의지를 불태우고, 그런데 그 길이 너무 힘들어 지치게 되면, 또 오늘은 내 안위가 편한 쪽으로 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 또다시 불끈 애국심으로 차올랐다가...

뭐 그렇게 변절자였다가 애국자였다가 하며 살지 않았을까....

 

물론 밀정도 아무나 시키지는 않겠죠.ㅎㅎ 제 얄팍한 마음의 행태를 보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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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또 하나, 영화 속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정채산이 독립투사들에게 이정출을 우리 편으로 먼저 만들자고 제안하며 한 말입니다.

 

“어차피 이리저리 옮기는 게 그자들 특징이라면, 이번엔 어느 편에 서게 되는지 봅시다.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요.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오,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거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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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거 아니겠소.”

 

우리는 마음으로 살기에... 그 마음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과가 되고 역사가 되기에...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거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영화 <밀정>의 카피는 ‘적은 늘 우리 안에 있었다’이지만, 현실에서의 우리 카피는 ‘적은 늘 내 안에 있었다’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어떤 결과도, 누구의 탓도 아닌, 다 내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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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마음이 어디로 움직일까.

적이 이길까, 내가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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