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있는 사람과 견격 있는 강아지의 감동실화 ‘하치 이야기’
1923년 12월. 온 세상이 하얘질 만큼 큰 눈이 내린 날 세 마리의 강아지가 태어납니다.
뼈대 있는 족보를 자랑하는 아키다견 순종 강아지들. 그중 한 마리가 동경대학의
우에노(나카다이 타츠야 분) 교수에게 선물로 보내집니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키다현에서 동경까지 긴 여행을 하게 된 강아지는 이틀 밤낮을 기차 짐칸에
실려 오느라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온 보람은 있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당당하게 쫑긋 세운 귀, 왼쪽으로 말린 귀여운 꼬리와 촉촉하게 빛나는 코를 가진
강아지로서 단번에 우에노 교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니까요.
우에노 교수는 땅을 힘차게 딛고 선 강아지의 다리 모양이 ‘여덟 팔(八))’ 자 같다며
하치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외동딸마저 갑작스런 결혼으로 집을 떠나게 되자, 우에노 교수와 하치는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됩니다.
그런 어느 날 하인이 먹이를 줄 듯 말 듯하며 하치에게 장난치는 걸 보고는
우에노 교수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개에게는 견격이 있어, 견격을 존중해 줘야지.”
아내에게 특별히 하치를 부탁하고서야 우에노 교수는 겨우 집을 나섭니다.
하치를 볼 생각에 퇴근길의 발걸음조차 빨라진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면 서재에서 함께 자고,
볕 잘드는 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벼룩을 잡아준 후 함께 목욕을 할 만큼 하치에 대한 사랑이 자식 못지않습니다.
무럭무럭 자란 하치는 그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매일 동경의 시부야역까지 우에노 교수를 배웅하고
또 저녁이면 정확한 시간에 마중을 나가는 충심을 발휘합니다.
1925년 5월.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봄날,
배웅길에 나서던 하치가 안 하던 행동을 하며 이상하게 짖어댑니다.
사람은 아무도 몰랐던 그 불길한 느낌을 하치는 벌써 감지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날 강의 도중 뇌출혈로 쓰러진 우에노 교수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장례를 치른 후, 부인은 딸네 집으로 가게 되고 딸은 하치를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 슬프다며,
하치를 먼 친척집으로 보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슬픔도, 죽음도 잊고자 애쓰지만 하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줄을 끊고 친척집에서 나온 하치는 멀고 먼 길을 달려 우에노 교수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바뀌었고, 개를 싫어하는 새 집주인에게서 돌아온 건 돌팔매뿐입니다.
이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떠돌이 개가 되어버린 하치.
상처투성이 더러운 개가 되었어도, 하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부야 역을 찾습니다.
마치 우에노 교수가 살아 있을 때처럼, 정확한 시간에 맞춰, 무려 십 년 세월을 말입니다.
그리고 1935년 3월. 소담스럽게 흰 눈이 내리는 날,
늙고 병든 하치는 시부야역에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그토록 그리웠던 주인 곁으로 돌아가게 되어서일까,
하치의 마지막 모습은 오히려 편안해 보입니다.
이제 길거리에서 아무거나 먹고, 동네 개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고생은 끝났구나, 하며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까요.
사람과 동물 이야기, 특히 강아지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는 참 많습니다.
꽤 많은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치 이야기가 조금 더 애틋한 것은 시부야역을 지키는 하치의 흔들림 없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일 겁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기억하고, 하염없이 지켜가는 모습이
내 삶의 순간들과 이어지며 긴 여운을 주는 것이지요.
때문에 50여 년이 지났음에도 영화(1987년 제작)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뿐인가요,
저 멀리 미국까지 알려진 하치 이야기는 2009년 리처드 기어 주연으로 리메이크됩니다.
하치 역할을 한 아키다견은 2개월가량 특별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코야마 세이지로 감독은, 눈물 짜기 없이 담담하게 그려가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를 가장 만족시킨 배우는
바로 하치였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치를 보노라면 어쩜 저렇게 당당하고 초연할까, 싶습니다.
사실, 하치를 보며 1년째다, 2년째다... 시간을 따진 것도, 감동적이라며 신문에 기사를 낸 것도,
동상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며 의미 부여를 한 것도 사람들이지, 정작 하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헛고생이라고, 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냐고, 사람들은 말 못 하는 짐승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지만
하치는 사랑 받았던 그 날들을 잊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팬데믹의 충격으로 한 해를 보내고, 혼돈과 힘듦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맞이하는 새해.
그래서 더욱 누군가에게 감사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큰 위안이 될 거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았던 사랑의 순간은, 나의 마음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줄 테니까요.
그 감사가 한결같기를,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며 오늘 하루도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출처] "영화 하치 이야기 스틸 사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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