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_공정할 거라는 착각
‘아… 불편해. 나만 이런가?’
좋은 노래 실컷 듣는 귀 호강에, 긴장감 짜릿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설혹 재미가 없을 수는 있어도 불편할 리는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이 불편함의 이유는 뭘까.
11월 16일부터 시작한 JTBC 예능 싱어게인,
어마무시한 실력자들이 나오는 오디션이겠구먼, 재미겠당, 기대했습니다.
기대 안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게, MC가 이승기입니다. (^ㅎ^)
심사위원? 이선희, 김종진, 유희열, 김이나, 조규현, 선미, 이해리, 송민호.
(솔직히 몰랐던 분도 있지만, 심사할 만한 분들인 거 인정합니다.)
참가자? 비장합니다.
출연 자격이 앨범을 한 번이라도 내본 사람, 장르도 세대도 경력도 다 다른 무명가수들이,
이름을 알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나온다니,
시청자인 저는 감동할 준비만 하면 됩니다.
1화를 보고 ‘뭐지, 이 불편함은?’ 싶었습니다.
2화를 보고는 ‘마음이 쫌 힘드네…’ 했습니다.
3화까지 보고는 ‘아, 이건 좀 아닌 듯한데’ 싶었습니다.
내가 요즘 컨셉을 따라가지 못하는 꼰대인 건가?
불편하면 안 보면 된다지만,
나도 쿨-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보고자, 4화도 챙겨 봤습니다.
역시나 그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왜? 재미없다가 아니라 불편함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이름 대신 1호, 2호, 3호…?
탈락하기 전까지는 이름 대신 번호로만 불린다는 것에 일단 갸웃했습니다.
이름은 그냥, 다 있는 호칭인데…
‘무명 가수'라 할 때의 이름 없음과,
출연자에게 이름 없이 번호를 주는 걸 연결한다는 게 ‘뭐지?’ 싶었습니다.
그런 시선으로 봐서일까요.
가수라는 직업을 갖고 나름 음악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번호를 가슴에 달고, 덜덜덜 떨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경쟁 속에 자기를 내던질 때의 짜릿한 긴장감으로,
혹은 꼭 잘되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는 희망찬 떨림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누군가로 살고 싶은 간절함 만큼
남에게 맡긴 내 이름표 찾으려 애쓰는 약자처럼 느껴져 편치가 않습니다.
물론 노래만으로 평가받게 하자? 하는 그런 좋은 의도였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어느 동네 모처엔 저처럼 불편한 시청자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탈락자만이 이름을 소개할 수 있다?
출연자는 탈락자가 되어야만 자기 이름 석자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라운드에 진출 못한 탈락자는, 큰 실망을 감추며 애써 담담하게 말합니다.
"저는 가수 000 입니다."
그때 내뱉는 나의 이름이 자랑스러울지, 당당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그런 순간에, 스스로 내뱉게 한다는 게 불편합니다.
(확실히 복면을 벗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 눈엔, 오랜만에 TV 무대에서 자기 노래를 불러본 대가라 하기엔
또 한번 고스란히 감내해야 상처로 보입니다.
심사위원들이 뭐라고 위로를 해도,
앞으로는 자기 이름으로 열심히 활동하기 바란다며 응원을 해줘도 말입니다.
미안하게도, 그런 식의 소개로는 누구의 이름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진심은 없이
절차를 밟았다고 우기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불편합니다.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사람에게 A를?
앞서 말했듯이 저는 8인의 심사위원들을 음악가로 존경하고 인정하는 바입니다.
출연자가 정말 잘 불러줬으면 하고 바라보는 눈빛,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고 해주는 진심 어린 한마디,
심사를 떠나 동료이자 선후배로서 정말 잘되기를 응원하는 마음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나쁜 사람 하나 없는데 피해자는 있는 느낌일까요?
출연진 구성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가수라는 ‘꿈 하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 8명의 심사위원에게 나의 다음 무대가 궁금하냐, 아니냐를 평가받기에는,
그들의 장르가, 경력이, 감성이, 배경이, 목표가… 너무나 다릅니다.
“아는 사람 있으니까, 못 쳐다보겠어.”
“누나가 왜 여기 나와?”
“본인이 무명이라고 생각하세요?”
심사위원과 사회자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들면서,
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니까, 오디션이라는 공정한 대결로 봐 달라는 건가요?
유희열 심사위원조차 '찐무명'조를 보며
"이 팀이야말로 이 오디션에 맞는 팀이다"라고 무심코 말합니다.
어쩌면 저 혼자 현실감 쩔어서 더 불편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왜 그 옛날의 통기타 가수가, 20년간 수도 없이 무대에 섰던 로커가,
‘내 팬이 되었다면?’이 아니라,
‘내 다음 무대가 궁금하다면?’이라는 기준에 맞추며,
오디션에 걸맞은 1인이 되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노래가 전부인, 그들의 무대는 다 어디 갔나 하는 답답함.
공정한 거 같지만 공정할 수 없는 출연자들,
공정하게 하지만 공정할 수 없는 심사위원들.
그 어색한 공기가 느껴져 편안히 즐겨지지가 않습니다.
내 맘대로 재기획 _ 그냥 공상, 망상
[노래에 인생을 바쳐온 무명 가수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자신은 어떤 음악을 해온 누구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 섭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심사위원과 시청자는 팬이 되었다면 버튼을 누릅니다.
팬이 몇 명 이상 생긴 가수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합니다. 탈락자는 자기 이름을 걸고 큰 무대에 섰다는 경험과 단 몇 명일지라도 팬을 얻고 떠납니다. 합격자는 더욱 다양한 끼와 실력을 보여주며 계속해서 팬을 늘려갑니다…]
하릴 없이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보니,
무대가 절실한 무명 가수에게 멋진 무대를 선사하고, 팬을 만들어줌으로써,
그들이 다시 한번 가수로서, 한 사람으로서 어게인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제가 기대했던 ‘싱어게인_무명가수전’이었나 봅니다.
PS)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재야의 실력자, 한땐 잘나갔지만 지금은 잊힌 비운의 가수 등 ‘한 번 더’ 기회가 필요한 가수들이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신개념 리부팅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싱어게인 소개 글이 다시 쓰여졌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기억 못한다고 ‘비운의 가수’라고 정의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리부팅’ 해준다며, 한순간이라도 삶을 정지했던 사람처럼 대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진 출처] JTBC 싱어게인_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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